이홍빈 <당조삭방군연구> 1-5 북수 양 대도호부의 확립 pp.42~43 書案

이에 근거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연연도호부는 정관 21(647) 설립되어, 철륵제부를 관할했고; 영휘 원년 당이 거비를 평정한 후에는 단지 한해도호부를 증설하여, 오로지 거비부를 안설시키기 위한 낭산도독부와 정관 4년 설치된 정양, 운중 2부를 관리했고, 이 중에 속한 부중은 곧 돌궐인이었다는 것이다. 지역을 논하면, 이 두 부가 소할한 부락은 종으로 대막 남북에 걸쳐 있었고, 분획의 표준은 오로지 부락에 달려 있어 지역이 같지 않았다. 용삭 3년 개명 정리한 후, 한해부는 적북을 전적으로 관리했고, 운중은 곧 적남을 서리했다. 인덕 원년(664) 정월, 운중은 선우대도호부로 개칭했고; 총장 2(669) 8, 한해 또한 안북도호부로 개칭했다.(124) 이에 이르러, 당조는 철륵제부(회흘을 주로 함)와 돌궐 항부를 공제하기 위해 관내도 북부 대막 남북에 특별히[专门 전문] 양 대도호부 체제를 설치하여 정식으로 확립시켰고, 그 지위는 당조의 도호부 체제 중에서 최고인 급위에 속했다.(125) 위의 글에 토론한 것과 연계하여, 우리는 당조가 돌궐 계통 세력과의 관계를 처리한 것을 대략적으로[大致 대치] 묘술할 수 있다 :

  정관 4(630) 당 태종은 동돌궐을 정복한 후, 힐리가한과 돌리의 부중을 널리 유주, 영주 사이 곧 역사상 장성의 연변 지역에 안치시켰고, 원유의 부락 추장, 수령들을 도독, 자사로 삼아 기미부주체제를 설립했다. 정관 21(647)에서 고종 영휘 원년(650)에 이르는 사이, 당정은 대막 남북에 또 현재 선우, 안북이라고 칭하는 두 대도호부를 분별하여 설립했다. 기미부주는 안무함에 무게를 두었고, 도호부는 곧 안무, 정토를 모두 중시했다. 전자는 원유의 추령을 주로 하였고, , 번의 제도를 결합하여, 호한 잡뉴[杂糅 잡뉴]의 쌍궤 체제를 형성했고(126); 후자는 곧 당조가 직할한 군정기구로, 임관은 모두 당정으로부터 나왔고, 주요한 목적은 군사수단으로 변강을 공제하는 것이었다.(127). 기미부주로부터 도호부에 이르기까지는, 당정이 북부 변지를 공제하려는 수단이 점차[逐步 축보] 강해졌음을 보여준다. 사실상, 앞의 글에서 담론한 것과 같이, 기미부주 스스로의 제한이 그것이 변강 원지의 돌발사변 혹은 긴급상태에 부응하지 못하도록 했고, 이는 바로 당정으로 하여금 더욱 보공[ 미보]할 수 있는 다른 종류의 방법을 찾도록[寻找 심조] 했다. 군사 주방의 성질을 가진 도호부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나온 것이나[应运而生], 당정이 맨 처음에는 서역에 진행하여 창시한 것이었고, 그런 후에 다시 관내 북부에 이르러 추행한 것이었다. 관내 구역으로써 말하면, 당정으로 하여금 이런 종류(도호부)의 방법을 취하도록 촉구한 직접적 원인은, 돌궐 멸망 후 북방에서 서로 이어져 출현한 설연타와 거비 등 부의 세력이 확대되고 북강을 위협하는 사실이었다. 그 효과는 문헌에 기재된 것에 근거해, 고종 영휘(650~655) 연간 이후, 당조의 북부 변지에 큰 전쟁이 없었던 것이 30년 동안 지속된 것이었다.(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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