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사와 마사아키 <당대의 '본전' 운용에 대해> 1. ‘본전’ 관련사료의 검토와 역사적 경과 (1) 당 초기의 사료에 대해 書案

1. ‘본전관련사료의 검토와 역사적 경과

 

(1) 당 초기의 사료에 대해

 

전술한 제 연구에 있어 본전에 관한 사료, 특히 당대의 월봉제에 관련된 공해본전의 사료가 소개되어, 연구가 심화되어 왔다. 그 중에서, 당 초기의 사료에는 혼란이 있어, 몇 개의 오류가 있다고 하는 지적도 되어 왔다. 의론의 최초에 이들 사료의 문제에 대해 정리해 보고 싶다.

당 초기의 사료 문제라고 하는 것은, 무덕 연간으로부터 정관 연간까지의 공해본전의 설치와 폐지에 관련된 사료, 특히[ことに] 그들의 계년에 관한 문제이다. 거기서 현존하는 관련사료의 계년과 출전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 1과 같이 된다.

이 표에 게재된 사료 외에 <신당서> 식화지에도 기사가 있으나, 그 신뢰성에 대해서는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단 참고에까지 쓰면, 무덕 원년의 조의 맨 뒤에 기후로서 송해본전설치의 기사를 들고, 정관 12년의 조에 폐지, 14년의 조에 설치와 폐지의 기사가 계속된다.

이와 같이 설치와 폐지의 연호가 여러 가지로 기록되어 있고, 치폐의 시기가 대응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들 사료에 혼란이 있다는 것은 당연히 예상되는 것이다. 거기서 이들 사료의 계년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나, 그 전제로서 사료의 기술 내용도 살펴보자. 표 중의 각 사료의 필요 부분은 다음과 같다.

No.1a : <당회요> : 무덕 원년 12, 공해본전을 두었고, 제주의 영사로 하여금 그것을 주관하게 했으며, 착전영사라고 하였고, 매 사마다 9명이었으며, 이부에 보임했고, 주관하는 바 5만 전 이하는, 시사에 판역(판매하여 바꿈, 교역함)하며, 매월 식전 4천 문을 납입했고, 세가 차면 관위를 주었다

b : <책부원구> : 무덕 원년 12, …그 봉전의 제도는, 경사 제관에 처음 공해를 두었고,

No.2 : <당회요> : 정관 원년, 경사 및 주현에 모두 공해전을 있게 하고, 그로써 공사의 비용을 공급했으며, 그 후 용도가 부족하여, 경관은 봉사가 있었을 뿐이고, 제사에는 공해본전을 두어, 그로써 본관이 무역하여 취식하고, 인원의 다소를 헤아려 월료로 삼았다,

No.3 : <통전> : 정관 2년제, …그 봉전의 제는, 경사 제관에 처음으로 공해를 두고, 행서 및 번관에 영하여 흥역(판역을 일으킴, 판역함)해 봉료에 충당하게 하고,

No.4 : <당회요> : 정관 11, 제사의 공해본전을 파하고, 천하의 상호 7천 명으로써 서사로 하여, 방합제를 보여, 그 징과하는 것을 거두게 하고, 관원의 다소를 헤아려 그것을 지급했으며,

No.5a : <통전> : 정관 12, 공해를 파하고, 서사 7천 명을 두었으며, 제주의 상호를 취하여 그것으로 삼고, 방합례에 준하여, 그 징과한 것을 거두게 하고, 3세에 한번 고쳐, 인원의 적고 많음을 헤아려 나누어 지급했고,

b : <책부원구> : (정관) 12 3, 간의대부 저수량이, 무덕 이후, 국가의 창고가 지나치게 이어서 비어, 경관의 요전에 상응해, 아울러 공해본을 지급하고, 당사의 영사, 번관에 영하여, 흥역하고 급리하게 해, 관원의 다소를 헤아려 분급한 것으로써, 이에 상소해 말했다. …황제가 그것을 채납하고, 그 달에 칙을 내려, 모두 정지하고, 다시 서사 7천 명을 두었는데, 제주의 상호로 충당했고, 방합례에 준하여, 윤과했으며, 2년에 한번 바꾸고, 관원의 다소를 헤아려 나누어 지급했으며,

c : <당회요> 91 : 정관 12 2, 간의대부 저수량이 상소해 말했다, …황제가 그를 채납하고, 그 달 23일 칙을 내려, 모두 정지하고, 고쳐서 서사 7천 명을 두었으며, 제주의 상호로 충당했고, 방합례에 준해, 윤과하고, 2년에 한번 바꾸었으며, 관원의 다소를 헤아려 그것을 분급했고,

d : <당회요> 93 : (정관) 12, 다시 공해본전을 두었는데, 간의대부 저수량이 상소하여, …

No.6 : <통전> : (정관) 15, 부고가 아직 빈 것으로, 칙을 내려 경사에 있는 제사는 구제에 의거해 공해를 두고, 급전하여 본에 충당하며, 영사, 부사, 서사 등을 두고, 회역하여 납리하도록 영해, 관인의 봉료에 충당했는데, 간의대부 저수량이 상소해 말했다, …폐하께서 가까이 제사의 영사들이 공해본전에 착임하는 것을 허락하셨는데, 제사가 이 색인을 취하여, 착전영사라고 부르고, … 태종이 그를 채납해, 제사의 착전을 정지시키고, 구제에 의거해 본부에서 월봉을 지급했으며,

이상의 사료에 있어, 태방선부와 방선부는, 계년의 차이와 각각의 문언에 다소의 이동이 있으나, 동일한 기사이다. , 태방선부와 No.2도 내용에 공통부분이 있어, 출처가 같은 사료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의 문제는 뒤에 생각하는 것으로 하고, 선행 학설을 살펴보고 싶다.

당 초기의 사료의 혼란에 대해 검토한 것은 전게의 요코야마 히로오, 스즈키 준, 코가 노보루, 이춘윤, 류옥봉이다. 이 중 코가는 <신당서>의 기사 내용을 음미하는 것에 주안이 있었고, 또 월봉제의 연구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계년의 문제에 대해서는 사료마다의 차이를 말했을 뿐이다. 한편, 요코야마는 <통전>에 의거해 <당회요> <책부원구>의 기사를 제쳐두고, 정관 12년에 폐지, 15년에 있어 부활과 폐지로 고찰했다. 나아가 스즈키와 이는 사료마다의 계년 오류를 지적한다. 우선 표1 No.1a에 대해, 스즈키는 No.5b <책부원구> 505 방계부 봉록의 기사에 “(정관) 12 3무덕 이후, 국가의 창고가 더욱 이어서 빈 것으로, 경관의 요전에 상응해, 아울러 공해본을 지급하고, …”라고 되어 있어, No.1a와 거의 동일한 문장인 것으로부터, “무덕 원년으로 한 계년은 의심스럽다고 했다. 이는 개성 4년의 양사복의 말에 정관 이후, 이를 남겨두고 법을 폐했다라고 한 것, <통전>의 저자, 두우로의 신뢰성이 높은 것으로부터 생각하여, No.1a b는 오류이고 No.3이 옳다고 한다. 유의 지적도 비슷하다. 또 스즈키는 No.2에 의거해 정관 원년을 설치년으로 생각하고, No.3 <통전>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No.4에 대해, 스즈키는 <당회요>의 편자의 오기로 한다. 더욱이 No.5 6은 저수량의 상소에 관한 기사이나, 그것이 정관 12년이라는 것은, 당대의 다른 제 문헌을 보아도 명료한 사실이나라고 하고, 또 기사의 문의의 합리성으로부터 생각해, No.6 <통전>의 오류라고 한다. 스즈키는, 결론으로서, 정관 원년에 설치된 공해본전이, 12년에 저수량의 상소에 의해 폐지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같은 양상으로 유는 No.5 bc가 정관 15년의 기사를 12년으로 오기한 것으로 한다.

이들의 연구는 대부분 <통전> <당회요> <책부원구>를 대등한 사료로 취급하고, 기사 내용의 정합성 등으로부터 어느 족에 의거할 것인가를 선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도 말한 대로 <통전>에는 성립년대의 근접함 및 신뢰성이 높다는 것이 있다. 기사에 어느 정도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고는 해도, 우리가 사료를 비교한 위에 더 중시해야 할 사료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전게의 지적 중, 스즈키, , 유가 공통으로 드는 No.1 ab 및 스즈키가 든 No.4는 역시 오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즈키가 No.6을 오류로 한 점에 대해서는 납득되지 않는다. 그 이유의 하나는 저수량의 상솩 일어난 해에 대한 해석이 있다. 관견의 한에서는 당대의 다른 제 문헌에서 상소를 정관 12년의 사실로 하는 것은 No.5 b <책부원구>, c, d <당회요>이다. 그러나 이들의 사료는 그 자체가 검토의 대상이기에 판단의 근거로 들기에는 부적당하다. 스즈키는 그 외에 사료를 제시하지 않았는데, 적어도 신, 구 양<당서>의 본기 및 저수량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No.5, 6의 기사에서는 어느 쪽도 간의대부 저수량의 상소로 되어 있다. 거기서 양당서 저수량전을 보면 그가 간의대부가 된 것은 정관 15년으로 되어 있다. 똑같이 유는 <구당서> 동전과 <자치통감>을 근거로 정관 12년의 상소는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간의대부 저수량의 상소가 행해진 것은 정관 15년 이후이고, <통전>의 기사를 제쳐두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거기서 다시 사료를 보자. 일단 전술한 것과 같이 태방선부는 동일한 사료이고, 스즈키, , 유설이 옳다. No.1b No.3과 동일한 기사이고, <책부원구>가 잘못 삽입한 것이다. 다음으로 방선부인데, No.4 No.5a는 저수량의 상소를 포함하지 않고, bcd는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전술한 것과 같이 저수량이 간의대부가 된 것은 정관 15년이기에 bcd에는 혼란이 있고, 아마 계년도 동시에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No.5a가 옳은 것이 되고, 더욱이 No.6도 신빙성이 높은 사료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통전>의 기사가 가장 타당한 사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이 가능하다면, ‘공해본전은 정관 2년에 설치되어 동 12년에 폐지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는데, 그러면 정관 15년의 폐지 기사는 어떻게 생각되어야 할 것인가. 정관 12년부터 15년의 시점에서 다시 설치된 것일까. 이 문제를 고찰할 단서는 저수량의 상소 중에 있는 폐하는 가까이 제사의 영사가 공해본전을 운용하는 것을 허가하셨다라고 하는 문언의 가까운 시기가 언제를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스즈키는 그것을 정관 원년에 설치된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15년 전에 결정된 정책을 가까운 시기라고 하는 것은 역시 부자연스럽다. 나는 정관 12년에 공해본전이 폐지된 뒤, 다시 부활의 의론이 있었으나, 단기간 실시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것도 꽤 상세히 규정이 생각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저수량의 상소 중에서는, 본전의 액을 40으로부터 50, 매월의 이식을 4천 전(4)으로 하여, 매년 5만 전(50)을 납부시켜, 규정대로 이식을 납부하면 관위를 준다, 라고 하고 있다(사료 원문은 후게). 이는 명백히 매관길을 여는것이었고, 이에 대해 저수량이 원칙론을 전개시켜 반대했을 것이다. 즉 실시되엇는가 아닌가는 불명이나, 정관 12년 이후에 부활된 정책이 있고, 거기에 대해 저수량이 반대했던 것이다. 그 원칙론은 태종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기에, 공해본전 정책은 중단되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공해본전은 정관 2년에 설치, 12년에 폐지, 그 후 부활이 계획되었으나, 단기간 실시된 뒤, 15년에 다시 폐지된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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