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전의 당 태종 진왕 이세민 집단의 북제계 인사의 분석> 2-(2) 설도형과 사예대 書案

(2) 설도형과 사예대

 

설도형의 사예대부 임관의 사정은, <수서> 57 본전에서는, 이렇게 설명된다.

양제가 사위하자, 번주자사로 옮겼다. 그 해 남은 기간에, 상표하여 치사할 것을 구했다. 황제가 내사시랑 우세기에게 일러 말했다 설도형이 장차 이를 것이다. 의당 비서감으로써 그를 대하라.” 설도형이 이미 이르자, <고조문황제송>을 올렸다. …중략황제가 그것을 살펴보고 기뻐하지 않았고, 소위를 돌아보며 일러 말했다 설도형은 선조에 아름다움{좋음, 덕행}을 지극하게 했다. 이는 어조의 뜻이다.” 이에 사예대부를 배수시키고, 장차 그 죄를 두려 했다.

양제는 설도형을 번주자사로부터 중앙에 소환하여 비서감에 임명하려 했으나, 그의 <고조문황제의 송>을 읽고, ‘어조의 뜻이 들어가 있다고 하여, 사예대부에 임명해, 죄에 빠뜨리려 했다. ‘어조라는 것은 <시경> 소아 어조지습의 편명으로, 주의 쇠망을 불러온 유왕을 풍간하고, 창업의 영주 무왕을 회고한 시이다. 양제는 설도형이 수를 창업한 부친 문제의 치세를 회고하여, 암암리에 자신의 정치가, 수의 쇠망을 불러온다고 비판했다고 생각했다. <수서>를 그대로 읽으면, 설도형의 실각은, 대부 취임으로부터 계획되었다.

그러나, 이 양제의 설도형 등용의 동기는, 조금 부자연스럽다. 이 때, 설도형이 임명된 사예대부란, 양제에 의해 신설된 사예대의 장관이다. 사예대는 지방관찰을 맡은 기관으로, 그 설치에는, 관중 본위 정책으로부터 탈각해 보편적인 체제를 확립시키는 의도가 있었다. 그것만으로, 그 장관의 인사는 신중했을 것이다. 설도형은, 사예대부에 취임하기 전, 양주총관 번주자사를 역임했다. 양주는 양양을 치소로 하는 장강 중류역의 요충이고, 한편의 번주는, 옛 이름을 광주라고 한 영남의 요지이다. 설도형은 양주에서는 <수서> 57 본전에 재임하며 청간했고, 이민들이 그 은혜를 돌아보았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치적을 올렸다. 요지의 장관을 역임하고, 치적도 올린 설도형은, 지방 감찰을 총람하는 사예대부에 적임이었다. 양제가 설도형을 사예대부에 발탁한 것은, 실각을 의도했다기보다도, 설도형의 지방관으로서의 치적, 경험을 지방 감찰에 살릴 것을 기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이것과는 별개로, <수서> 67 배온전에는, 배온이 설도형의 죄를 논한 상주를 받아, 양제는 내가 젊을 때에 이 사람과 더불어 서로 따라 행역했는데, 나를 동치{어린아이}로 경시했다. 고영, 하약필 등과 함께 밖에서 위권을 멋대로 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설도형을 포함해 창옥에 들어진 고영, 하약필은, 문제 이래의 공신이다. 양제의 말로부터는, 그들이 거북한{경원시되는}[けむたい] 노신이었다는 것이 보여진다.

, 양제가 설도형에게 죽음을 내린 직접적인 동기는, 대업령의 완성이 늦어진 것에 대해, 설도형이 일찍이 고영을 죽게 하지 않으셨다면, 영은 반드시 의당 시행된지 오래되었을 것이다”(<수서> 57 본전)라고 한 것이 새어나간 것에 있다. 고영은 양제에 의해 주살되었고, 양제가 노신 설도형의 말을, 조정을 비판한 것이라고 곡해시킬 것도 충분했다. 이 설도형의 처형 이유는, 본절 모두에서 든 <수서> 57 설도형전에서, 양제가 설도형을 사예대부에 임명한 이유와 통하지 않는 것이 있다. 양제가 설도형을 배제한 동기로서, 선대 이래의 노신으로의 불만이 있었던 것도, 일개에 부정할 수 없으나, <수서> 57 설도형전에 있는 것처럼, 설도형 자신도 처형 직전까지, 자신의 처치가 가벼을 것을 확신했던 것과, 당시의 세인이, 설도형을 면죄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처형하는 데에는, 조금 억지로 하는 듯한 이유가 붙어 있었다.

그랬다고 한다면, 설도형의 실각의 이유는 따로 구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사예대부로서의 설도형은 어떤 행동을 보인 것인가.

사예대의 직장은 지방 행정의 감찰이다. 그 감찰 업무를 행하는 것은 사예자사와 그 부관인 사예종사들로, 매년 2~10월에 감찰을 행하고, 10월에 입조해 황제에게 부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엇다. 그 업무를 총람하는 것이, 장관인 사예대부이다. 이 사예대부에 취임한 설도형에 대해, <수서> 73 순리 경숙전에,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경숙은 자가 홍검이고, 하동 포판 사람이다. …중략양제가 사위하자, 영주군승으로 옮겼다. 대업 5, 동도에 조현했고, 황제가 사예대부 설도형에게 영해 천하군관의 장을 만들게 했다. 설도형의 장에 경숙을 칭찬해 말했다 마음이 철석과 같고, 나이들어서도 두루 도탑습니다.”

상기에 의하면, 사예대부로서 설도형은 천하군관의 장’(=지방관의 근무평정)을 작성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지방관의 최종적 인 평가는, 설도형에게 위임되었고, 지방행정에 큰 발언력을 갖고 있었다. 상기의 기사와 연관하여, <수서> 73 유검전에,

(유검이) 홍화태수를 배수했다. …중략대업 5년 입조했는데, 군국이 모이는 것{조집사?}을 마쳤다. 황제가 납언 소위, 이부상서 우홍에게 일러 말했다 그 중 천하에 청명함이 첫째인 것은 누구인가.” 소위 등이 유검으로써 대답했다. 황제가 또 그 다음을 물었다. 소위가 탁군승 곽순, 영천군승 경숙 등 두 사람으로써 대답했다.

라고 한다. 이 기사는, 전게 경숙전의 기사를 다른 각도로부터 전하는 것으로, 두 개의 사료에 기반하면, ‘천하군관의 장에서 성적이 우수한 자는, 유검, 경숙, 곽순 3명이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3명은, 어느 쪽도 설도형과 같은 하동군 출신이고, 설도형은 사예대부의 권한을 이용해, 동향의 인사를 끌어올린 것이다.

혹시 이 추측이 옳다고 하면, 설도형의 이 의도는, 사예대의 속관의 인사에도 미쳤을 것이다. 예를 들면, <수서> 58 이문박 전에,

박릉의 이문박은, …중략개황 중, 우기위가 되었고, 특별히 이부시랑 설도형이 아는 바가 되었다. …중략설도형이 사예대부가 되어, 그를 동도상서성에서 만나, 심히 그를 차민하여, 마침내 주서하여 종사로 삼았다.

라고 하는 것처럼, 설도형은 이전부터 그 재능을 유망하다고 보고 있었던[] 이문박을, 상주하여 사예종사로 임명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연관하여, 설도형이 임관하고 있던 당시, 어떤 인물이 사예대의 속관으로 취임했는가를 제 사료로부터 모아 보았다( 2).

No.

임관자

관직

본관지

조부

전거 및 비고

관직

관직

1

유탁

별가

?

?

?

?

?

66

2

방언겸

자사

제주임치

북위 송안태수

북위 광천태수

66 *북제에 사관해 제주주부가 됨

3

온군유

사예종사

병주기

?

?

북위 태중대부

61 91 온언박비 묘지

*북제의 문림관학사

4

이덕유

 

조군백

북제 상서우승

수 개주자사

72 33 72

5

두정장

 

상주항수

처사

북제 낙릉령

76 26

6

이문박

 

박릉

?

?

?

?

58

(범례) 전거의 사료 약기호는, =수서, =북사, =구당서, =신당서, =신당서 제상세계표. 숫자는 권수.

 

2를 일람해 해석되는 것과 같이, 계보 전기 불명인 1 유탁과 계보 불명인 6 이문박을 제하고, 2~5는 북제계로, 사예대의 속관에 북제계가 다용되었던 것이 판명된다. 이하, 전기 불명인 1 유탁을 제하고, 사예대의 속관에 취임한 인물의 약력에 대해, 검토를 더해 보자.

2. 방언겸 사예자사

방언겸은 방현령의 부친으로, 설도형의 우인이다. <수서> 66 본전에 의하면, 사예대가 창설되어, 조정이 천하지명의 사인으로부터 그 속관을 등용했을 때, 사예자사가 되었다. 먼저 든 이문박의 예를 염두에 두면, 방언겸의 임관에는 설도형의 의사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3. 온군유 사예종사

전술한 대로 온군유는, 온대아의 아버지로, 문림관 이래의 설도형의 우인이다. <구당서> 61 온대아전에 의하면,

부친 온군유는, 북제의 문림관학사였고, 수의 사주자사였다. 대업 말, 사예종사가 되어, 수의 정사가 날로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라고 하여, 온군유가 사예종사가 된 것은, 수의 양제의 대업 말년으로 되어 잇다. 그러나, 온대아전은 그 후, 온대아의 수대의 사적을,

(온대아가) 수에 사관해 동궁학사 장안현위가 되었고, 부친상으로 거직했다. 후에 천하가 바야흐로 어지러워져, 입사해 나아갈 것을 구하지 않았다.

라고 하여, 온군유의 죽음과 수말의 대란과의 차에는, 조금의 타임 랙이 있다고 생각된다. 더하여 온대아가 사관을 거부했다고 한다면, 적어도 대업 말년=14(618)보다 이전의 일이 된다. 복상의 기간을 넣는다고 한다면, 더욱이 온군유의 사예종사 취임은 시기가 거슬러 올라가게 될 것이다. <구당서>의 온군유가 종사에 임관했다고 되어 있는 대업말이라고 하는 표현은, 의문이 남는 것이다. 그것에 기반하여, 온군유의 아들인 온언박의 묘비를 보면 대업 초, 친상으로 거관했다라고 한다. ‘대업 초라고 하는 표현은, 대업 연간은 14년까지이고, 그 전기가 된다면, 대업 원년~5(605~609)경으로 생각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기에, 온군유의 종사 임관은, 설도형의 사예대부 재임기간과 일치한다. 온군유의 임관 배경에도 설도형의 의향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4. 이덕요 사예종사

이덕요는, 산동귀족 조군 이씨의 출신이다. 조부 이철은 북제의 상서우승으로, 부친 이순은 수의 개주자사였다. <수서> 72 본전에 의하면, 이덕요는, 대업 3(607)에 사예종사가 되었다.

5. 두정장 사예종사

두정장의 조부 두경은 처사이고, 부친 두유는 북제의 낙릉영이었다. <구당서> 73에 동생인 두정륜의 전이 있고, 상주 항수 사람이다. 설도형의 추천으로 사예종사가 되었다. 또 동생 두정륜(1-15)는 이세민 집단의 한 사람이다.

6. 이문박 사예종사

이문박은, 조부의 이력은 불명이나, 산동 박릉 출신으로, 북제계로 보아도 좋다. <수서> 58 본전에 의하면, 방현령과도 면식이 있다. 전술한 대로, 설도형의 추천으로 사예종사에 임관했다.

이상, 검토를 더한 5명 중, 5 두정륜, 6 이문박은 확실히 설도형의 추천으로 임관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2 방언겸, 3 온군유는 설도형의 우인이었으며, 역시 그 임관에는 설도형의 힘이 작용했다고 추찰될 수 있다. 단지 4 이덕요에 대해서는, 설도형과의 교류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또 그들 중, 사예대의 관직에 이어지는 전의 관위는, 2 방언겸, 3 온군유는 주사마에 지나지 않고, 5 두정장도 과거의 결과가 을제였다는 것이 불만으로 관에 호소했기 때문에, 병제로 낮추어져, 현정의 지위를 견디고 있었다. 6 이문박은 현승이 되었으나, 근무평정에서의 평가가 나빴고, 수년이나 임용되지 않았다. 어느 쪽도 북제계였기 때문에, 불우를 당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상의 사예대 속관의 인적구성에 기반하면, 자기에 가까운 북제계 인사를 등용하여, 사예대를 굳히려고 한 설도형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와 같은 설도형의 모습으로부터, 그가 이덕림 사망 후, 북제계 인사의 중심적 존재였다는 것이 판명된다. 그렇기에 북제계 인사와 널리 교제가 인정되는 것이다. 이것에 기반하면, 전술한 설도형의 인맥은, 설도형을 영수로 하고, ‘설도형 그룹으로 칭해져도 좋을 북제계 인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정치당파였던 것이, 밝혀질 것이다.

설도형은 사예대부에 임관하기 전, <수서> 57 본전에, “양제가 사위하자, 번주자사로 옮겼다. 그 해의 남은 기간, 상표하여 치사할 것을 구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이, 은퇴의 의사를 보였다고 한다. 그것에도 상관 않고 임관을 받아들였다. 이 모순된 행동의 배경에는, 양제의 요청과 같은 일도 있었으면서, 다시 중추의 지위에 취임하는 것으로, 문제기에 낮게 두어진 북제계 인사의 입장을 개선하려는 사명감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그의 정치 방침은, 수의 전기의 북제계 인사의 대표격인 이덕림과 통하는 것이 있다. , 설도형이 사예대에 북제계를 집결시킨 것은, 전토에 기반을 두려 한 양제의 일정의 양해가 있어 가능했다. 양제가 설도형을 등용한 이유는, 설도형의 지방행정의 식견을 기대했을 뿐 아니라, 북제계 인사의 대표격으로서의 영향력도 기대했던 것이다.

이상에 기반한다면, 설도형이 처형된 이유에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설도형은 사예대부로서 북제계 인사를 옹호했다. 이것은, 관중 본위 정책으로부터 탈각해 일원적 지배체제를 구축하려 한 양제로부터 양해를 얻어, 진행된 것이어야 했지만, 지나치게 진행된 결과, 비극적인 말로를 걸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りもさず], 그거슨, 이덕림의 실각과 같이, 북제계 인사의 정치적 지위의 불안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설도형의 실각으로써, 이덕림, 설도형과 영수를 바꾸어, 추진되어 온 북제계인사의 지위 향상을 목지하는 움직임은 돈좌되었다. 북제계 인사의 정치적 지위는 불우한 채로, 수말의 동란을 맞는 것이 되었다. 설도형 그룹들은, 예를 들면, 온대아는 이연의 태원 거병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대장군부 기실참군이 되었고, 안사고도 또 장안 진격 중인 이연의 군대에 투신했으며, 설도형의 아들 설수에 이르러서는, 적진에 있어, 어머니가 인질이 되면서도, 단신으로 도망해 당 정권에 투항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당조의 창업에 재빠르게 호응했다. 그 배경에는, 신왕조 창립에 적긎거으로 공헌하는 것에 의해, 북제계 인사의 지위를 향상시키려 한 의사가 작용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방현령 등 설도형 그룹의 계보를 잇는 사람들은, 이세민과 해후했다. 그들이 집단성으로써, 이세민 집단에 더해진 것은 전술한 대로이다. 그 집단성이 유지된 것은, 이덕림, 설도형 이래의 불우한 북제계 인사의 지위를 향상시키려 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산동 지역에 기반을 구축하고, 북제계 인사의 힘을 결집하여, 정권을 탈취하려 한 이세민의 이해와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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