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전의 당 태종 진왕 이세민 집단의 북제계 인사의 분석> 2. 수의 정계에 있어 설도형 (1) 설도형의 약력 書案

2. 수의 정계에 있어 설도형

 

(1) 설도형의 약력

 

전장에 있어, 이세민집단의 북제계 인사의 대부분이, 설도형의 인맥에 이어지고, 집단성을 갖고, 이세민집단에 참가한 것이 밝혀졌다. , 그들이 집단성을 계속 유지한 것은, 공통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또 설도형은, , 북제계인사 간에, 광범위한 인맥을 갖고 있었는가. 여기에 대해, 설도형이라는 인물이 아연 주목된다. 정치가의 인맥, 정치목적은, 그 입장에 의해 좌우된다. 그렇기에 본장에서는, 설도형의 전기를 <수서> 57 <북사> 36에 보이는 본전을 중심으로, 연보형식으로 정리한 위에(33항 참조), 수의 정계에 있어 그의 정치적 입장을 검토하고, 위와 같은 문제를 밝히고 싶다.

설도형은 하동 분음의 설씨 출신으로, 북위 말에 상산태수가 되었고, 뒤에 동위의 고환에게 후우된 설효통의 아들이다.

북제에 있어 설도형은, 사주목, 팽성왕 고유의 병조종사로 기가했고(22), 무평 원년(570)에는, 오례의 수정사업에 참여해 상서좌외병랑이 되었다. 이 사이, 설도형은, 한인귀족인 양음, 신술, 배헌지, 위수 등으로부터, 그 문재를 상찬받아, 명문 출신의 문인관료로서, 지보를 굳히고 있었다. 후에, 주객랑을 겸하고 진의 사자 부신을 접대하고, 부신의 증시 50음에 화답해, 북조뿐 아니라 남조까지 그 문명이 울렸다.

그와 같은 그가, 한인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문인관료의 아성인 문림관에 입관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때, 같은 문림관 학사인 이덕림, 안지추, 온군유 등과 교제해, 북제 멸망 후도 함께 북주, 수정권에 사관해 생애의 붕우가 되었다. 그 후의 관위 승진도 순조로워, 중서시랑, 태자시독이 되었다. , 한인 귀족의 영수인 조정, 최계서가 서로 이어 실각해, 문림관 그룹의 세력은 후퇴했으나, 설도형은 이들의 사건에 말려들지 않았고, 무평 7(576), 시중인 곡률효경과 정치의 중추에 섰다.

북제 멸망 후, 북주의 무제에 의해, 설도형은 문림관의 맹우들과, 관중으로 반분 강제적으로 연행되었다. 북주 정권 하에서는, 어사이명사(2), 사록명사(3) 등을 역임했으나, 북제의 정치의 중추에 있던 그에 있어, 너무나도 낮은 지위였다.

본래, 북주 정권으로부터 보면, 설도형 등은 망국의 유신이었고, 결코 우우될 입장은 아니었다. 특히 북주의 훈귀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관중의 구의를 가지고 나와, 북제계 인사로의 적개심을 노정했다. 역으로 북제계 인사로부터 보면, 문림관이 설립된 것으로부터도 간취되는 것과 같이, 상문의 기풍이 있던 북제 시대와 비교해, 살벌한 상무의 기풍이 넘쳐, 구시대적인 주례주의를 채택한 북주정권 하에서의 생활은, 결코 기분이 좋은 것[居心地]이 아니었다. 당 초까지, 정치, 산동지방 사회에 영향을 주는 것이 되는 관롱과 산동의 대립의 도식이, 서서히 양성되고 잇었던 것이다. 그것은 설도형이 북주에 사관했으면서도, 일시는 관위를 버리고 향리로 돌아간 것으로부터도 간취되는 것 같다.

이와 같이, 북주 정권 하에서 냉우된 북제계 인사들에 있어, ‘주수혁명은 현상을 타파할 다시 없을 기회엿다. 후지요시 마스미 씨는, 북제계 인사들이 수를 창업한 양견(수 문제)에게 적극적으로 공헌한 모습을, 이덕림을 중심으로 활사{생생하게 묘사함}하고 있다. 이하, 그의 연구에 의해, ‘주수혁명시의 북제계 인사의 동향을 약술해 보자.

이덕림은, 구 문림관 그룹의 한 명으로, 그는 북주 정권 하에서, 예외적으로 무제로부터 신임받아, 북제의 유신들의 임용을 전임받았고, 소위 북제계 인사의 동량격이었다. 그는 그 자각으로부터, 북제계 인사의 불우한 지위를 개선하기 위해, 재빨리[逸早] 양견의 막료가 되어, 수 창업 후는, 내사령이라고 하는 재상의 지위를 얻었다.

한편, ‘주수혁명즈음에, 설도형은 익주총관 양예의 군에 종군하여, 사천에서 반란한 반 양견파인 왕겸의 평정에 협력했고, 양예를 통해 양견에게 황제로의 즉위를 헌책했다. 후지요시 씨에 의하면, 이 설도형의 모습도 또 이덕림과 같은 문맥에서 이해된다고 한다.

수 창업 후도 이덕림은 북제계 인사의 동량으로서, 북제계 인사의 기반을 빼앗으려 한 향관 폐지나 향리제 시행에 반대하는 등, 그들의 권익 옹호에 진력했다. 이덕림의 당파의 중심에 있던 것은, 문림관계가 강한 결속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부터 살피면, 이덕림과 같은 문림과계의 사람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설도형은 돌궐 원정에 종군한 공적으로 내사사인이 되었고, 이 인사에 내사성을 영솔하는[ねる] 내사령 이덕림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은 예상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일원화 지배를 목지한 수 정권은, 평진 직후에 북제계 인사의 권익을 옹호하는 이덕림을 배제했다. 그것은, 수 정권 성립 후, 계속해서[なおも] 북제계 인사가 불안정한 지위에 있던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고, 설도형 등 북제계 인사에게 충격을 주었다.

정계에서 동량으로서 받들어진 맹우 이덕림의 사망 후, 설도형은, 문제기에는 이부시랑(개황 9~12(589~592)), 내사시랑(개황 12~인수 2(592~602))로 복무했고, 양제기에는 신설된 사예대의 장관인 사예대부(대업 3~5(607~709))에 취임했으며, 조정의 중추에 참여했다. 단 그 사이, 개황 12(592)에는 소위의 붕당으로서 일시 실각했고, 인수 2(602)에는 양주총관이 되어 정치의 중추로부터 배외되었고, 그리고 말년에는, 양제의 불흥을 사, 죽음이 내려졌다고 하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즉 그의 정치적 지위는 불안정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착목하고 싶은 것은, 설도형의 사예대부 취임이다. 설도형은 이덕림이 실각할 때까지의 사이, 어디까지나 이덕림파의 일원에 지나지 않았고, 이덕림 사망 후의 관직도 추요인 지위이지만 차관급에 머물렀으며, 주체적으로 정치를 움직이는 입장에 있지 않았다. 거기에 대해 사예대부는, 설도형이 처음으로 주체적으로 정치를 움직인 중앙의 장관급의 지위였다.

사예대부로서의 그의 동향을 좇으면, 그의 정치적 지위, 목적이 명확히 드러난다[()()]. 또 그는 사예대부 재임 중에 처형되었고, 그 처형 배경을 고찰하면, , 그의 정치적 지위가 불안정했는가 해명될 것이다. 그들의 것에 대해, 절을 고쳐 검토를 더하고 싶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