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빈 <당조삭방군연구> 1-3 기미부주의 설치 pp.20~27 書案

3절 기미부주의 설치

 

  정관 4(630) 이래 돌궐을 안치하기 위해 가장 이른 일군의 기무부주를 설치한 후, 당정은 이러한 방법을 끊임없이[断地 부단지] 주변의 각족 세력을 안치하고 공제하는 데에 취용해, 요즘의 연구에 근거하면, “당 고조 무덕 원년 이래로, 선종 대중연간까지 240년 내, 모두 기미부주 설치가 끊이지 않았다”. 이는 기미부주가 확실히 당조 결책집단이 주변 외족을 공제한 하나의 유효한 방법이었음을 설명해준다.

  <신당서> 지리지7(이하 간칭 <신지>)에 열거된 당의 기미부주는 주로 관내, 하북, 농우, 검남, 강남과 영남 등 6도에 분포하고 있다. 그 중 관내도 기미부주는 돌궐 및 후래의 회흘, 당항, 토욕혼에 많이 설치된 바이고, 본문과도 관계가 밀접해, 고로 아래 글에 먼저 본도 소속 기미부주로 이루어진[制成] 표를 두고, 다시 토론하겠다.

기미부주명칭

세력분포

예속관계

연연주, 계록주, 계전주, 동고란주, 촉룡주, 연산주. 당항제주부, 청새주, 귀덕주, 난지도독부, 방지도독부, 상흥도독부, 영평도독부, 욱정도독부, 청녕도독부, 충순도독부, 영보도독부, 정새도독부, 만길도독부, 동용주도독부, 동하주, 정변주도독부, 포주, 북하주, 사의주, 사락주, 창새주, 호주, 조주, 귀주, 부주, 우주, 비주, 서귀주, 장주, 포주, 개원주, 귀순주, 순주, 오룡주, 휼주, 차주, 개주, 열주, 회락주, 오장주, 낙주.

철륵제부, 회흘, 설연타, 당항.

영주도독부

정양도독부, 아덕주, 집실주, 소농주, 발연주. 달혼도독부, 고연주, 보흘약주, 계탄주, 골주, 저속주, 안화주도독부, 영삭주도독부, 복고주도독부, 영삭주.

돌궐, 설연타, 토욕혼.

하주도독부

방지주도독부, 영정주, 종주, 옥주, 박주, 임주, 윤지, 위주, 장주, 보주, 의정주도독부, 당주, 교주, 오주, 서융주, 야리주, 미주, 환주, 안화주도독부, 영화주, 위주, 욱주, 막주, 서창주, 종주, 유주

당항.

경주도독부

혼주.

토욕혼.

연주도독부

운중도독부, 사리주, 아사나주, 탁주, 사벽주, 백등주, 상건도독부, 욱사주, 예실주, 비실주, 힐략주, 호연도독부, 하로주, 갈라주, 협질주

돌궐.

선우도호부

신려주, 혼하주, 낭산주. 유계주, 전안주, 거연주, 계락주, 여오주, 준계주, 선약주, 한해도독부, 금미도독부, 유릉도독부, 구림도독부, 견곤도독부.

돌궐, 회흘, 철륵제부.

안북도호부

 

  상표의 기재에 근거하면, 관내도에 분설된 기미부주는 비교적[较为] 주로 영주(치소 회락, 현재 영하 영무 서남), 하주(치소 삭방, 현재 섬서 정변 백성자), 경주(치소 안화, 현재 감숙 경양), 연주(치소 부시, 현재 섬서 연안) 4주와 선우, 안북 양 대도호부 내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주부에서 안치한 세력은 돌궐, 철륵제부, 회흘, 설연타, 당항, 토욕혼 등을 포괄한다. 현재 이 표에 근거해 각 부주가 처음에 세워진 정황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 (46)

  상기 표 중 영주도독부 할지 내의 연연, 계록, 계섲,s 동고란, 연산 등 주는, <신지>를 살피면, 모두 태종 정관 21(647) 회흘 제부에 나누어 세워진 바이다. <통감> 198 당 태종 정관 21년 정월 조에 일컫기를 :

 

  병신일, 조서로 회흘부를 한해부로 하고, 복골을 금미부로, 다람갈을 연연부로, 발야고를 유릉부로, 동라를 구림부로, 사결을 노산부로, 혼을 고란주로, 곡설을 고궐주로, 해결을 계록주로, 아질을 계전주로, 계필을 유계주로, 사결별부를 대림주로, 백로를 전안주로 하고; 각각 추장을 도독, 자사로 삼았으며, 각각 금은 증백 및 백포를 내렸다.

 

  당시, 막북 초원 세력의 최강이었던 설연타도, 한때 당조에 신속했다. 그러나 당 태종이 발병하여 요동의 고려를 정벌하는 데에 이르러, 설연타 가한 다미는 탈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여기고, 군대를 남진시키려 했다. 당측은 먼저 강하게 시작해{착수함}[下手], 회흘, 복골, 동라 등과 병력을 연합하고 다미를 향해 진공해, 그를 격패시켰다. 원래 설연타의 공제를 받던 철륵 9성이 분분히 이탈해, 바꾸어 당에 귀부했다. 태종은 친히 경주(치소, 안정, 현재 감숙 경천 북쪽), 영주 등으로 위무하기 위해 갔고, 제부의 추수들이 입공하고 내조해, 이에 바로 21년 정월의 책봉이 있게 되었다. 한 학자가 여긴 대로, 태종이 경주, 영주에 행행하여, 기미부주를 거느리고 또 막북에 추행한 것은, “당조와 막북 각족의 정치, 경제와 문화적 연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당조의 통일적 다민족국가적 정치국면을 공고하게 하고 발전시켜”,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47) 연연주는 다람갈부가 사는 땅이 되었고, 계록주는 해결부가 사는 곳과 연관되어 있고, 계전주는 아질부로써 설치되었고, 동고란주는 혼부로써 설치되었는데, 그들은 원주지가 모두 막북에 있고, 또 초기에 도독부가 되었으며,(48) 뒤에 남하하여 영주 속하의 제현에 교치되었다. 연연주는 원래 연연도독부였고, 현재의 몽고 오란파탁 일대에 분포했으며,(49) 현종 개원 원년(713) 회락현(치소 현재 영하 영무 서남)에 교치했다. 계록, 계전 역시 이곳에 교치되었다.동고란주는 정관 20(646) 철륵이 귀부한 것에 따라 영주도독부에 설치되었고, 뒤에 변동이 많이 있었으며, 개원(713~741) 6호주를 폐했다가, 다시 설치했고, 명사현(현재 영하 중녕 명사진)에 교치했다.(50) 연산주는 온지현(현재 영하 염지 혜안보 북쪽)에 교치되었다. 촉룡주는 정관 22년 한해도독부가 기치되어 나간 것에 따라, 구라발부에 설치되었고, 개원 초 영주에 내부해, 온지현에 교치되었다.(51)

  당항 제주 및 청새, 귀덕 2개 주는, <신지> 기재에 충분히 밝혀져 있다 :

 

  정관 3(629), 수장 세봉보뢰가 내부했고, 그 후 제성의 수장들이 서로 이끌어 또한 내부해, 모두 그 땅에 나란히 주현을 설치하고, 송주도독부에 예속시켰다. 5년 또 그 땅을 열어 16개 주, 47개 현을 설치했고; 또 탁발적사의 부로 32개 주를 설치했다. 건봉 2(667) 토번이 입구한 것으로, , , , , , , , , , , , 차 등 12개 주를 폐했고, 함형 2(671) 또 잠, 2개주를 폐했다. 안록산의 난으로, 하 농이 토번에게 실함되어, 이에 당항주로 남아있는 바를 영, , (치소 유림, 현재 섬서 유림 남쪽), 하주의 경계로 사천시켰다.

 

  여러 문헌을 살피면, 당항은 당조의 발생과 더불어 밀접한 관계가 있고, 바로 정관 3년부터 세봉보뢰가 내부했다. 당시 남회주(즉 무주, 치소 문산, 현재 사천 무문)도독 정원수가 수명해 초유해, 보뢰 일행이 장안에 진입했고, 당 태종의 장려를 받아[受到], 그 땅을 열속시켜 궤주로 하고, 보뢰를 자사에 임직시켰다.(52) 그 후 제성의 추장이 내속해, 당이 거, , , 4개 주를 설치했다.(53) 위의 글 중 탁발적사는, 원래 토욕혼에 신속하고 있었는데, 후에 당의 장수가 권하고 유세하는 것을 거쳐, 또한 무리를 이끌고 당에 귀부해, 당이 탁발적사를 서융주도독에 배수시키고, 이씨 성을 내렸으며, 그 땅에 의, , , 가 등 32개 주를 설치했다. 이후 토번이 강성[炽盛 치성]하여, 탁발 제부는 핍박함을 받아 경주(치소 안화, 현재 감숙 경양)로 내천되었고, 그 땅은 모두 토번에 들어갔다. 이는 또 <신지>의 건봉, 함형 연간 중 제주가 파하고 폐해진 원인이기도 하다. 양당서 당항전은 당항의 활동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데, <신지>의 위의 글에 기재된 것과 더불어, 개별 주현이 조금 다른 것을 빼면, 대체로 서로 같다. 당항 제부는 당과 토번 사이에 와서 처했고, 쌍방의 군사, 정치적 영향을 받아 서북지구에서 중요한 작용을 발휘했다. 삭방군 건립 후, 그 부는 그와 더불어 관계가 밀접했고, 의존하면서도[依靠 의고] 또 막고 꺼리는 역량이 되었는데, 이는 당시 당조의 군사 구성{조직/분포}[布局 포국]과 정치 활동[运作 운작]에 모두 하나의 홀시할 수 없는 인소(상세한 것은 뒤에 언급)였다.(54)

  난지, 방지, 상흥, 영평, 욱정, 청녕, 충순, 영보, 정새, 만길, 낙용 등 도독부는 조하에 모두 문자로 설명이 없으며, 단지 정변도독부 조하에정관연간 중 설치해, 처음에 농우에 있었고, 뒤에 경주의 경계로 교치되었다라는 약간의 언급이 있으며, 본부 속하의 제주는 정관 4(630), 5, 10년 및 12년에 세워졌다. 이들 도독부의 설치를 살펴보면[ 간래] 모두 동돌궐 멸망 후의 산물들이다. 그 중 난지도독부는 중종 신룡 3(770)에 설치되어, 6호주와 관계가 밀접하다.(55) 정변, 낙용 등 부의 설치는 곧 당항과 더불어 관련이 있다. 전문에 탁발적사가 당에 귀부하고, 서융주도독을 수임한 것을 언급했는데, 토번이 제부를 위박해 와, 그들은 동으로 사천시켜 줄 것을 요구했고, 당이 이에 경주 경내에 정변도독부 등을 설치해 그들을 안치했다.(56)

  하주도독부 할내의 정양부 및 그 소령인 아덕, 집실, 소농, 발연 4개 주는, 정관 4년에 설치되었다. <신지>에 명확히 일컫듯정관 4년 힐리의 부중을 나누어 둘로 하고, 좌부로 설치했으며, 영삭(현재 섬서 정변 동쪽)에 교치했다.” <통감> 193 당 태종 정관 4(630) 4월조에는또 힐리의 땅을 6개 주로 나누어, 왼편에 정양도독부를 설치했다라고 한 아래쪽 호주에도 또정양도독부를 영삭에 교치했다라고 했다. 이들 기재를 살피면, 정관 4년 열치된 정양부는, 하주 영삭현 경내에 교치되었다. 유통 선생은 고증을 거쳐, 정양이 하주 내에 설치되었다는 것은사실이 크게 잘못된 것이다라고 했고, “정양의 유지는 현재 내몽고 자치구 호화호특시 동남 45km 미계고성에 있다고 했다. 그는 당이 힐리를 멸망시킨 후, 부획된 부락을 안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지[就地 취지]에서 해결하는 것이었고, 그들을 몇백 리 밖으로 몰아내어[驱赶 구간], 거듭하여 새로이 하나의 생활구역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정양과 운중 2부는 한 대 정양과 운중 고성에 설치되었다.(57) 상술된 두 종류의 설명의 분기점은 정양부가 하남 또는[还是] 하북에 있었냐는 것이다. <통감> 195 당 태종 정관 13(639) 6월조에는 :

 

  결사솔이 반란한 이래로, 일을 말하는 자들이 많이 돌궐을 하남에 남겨두는 것이 편하지 않다고 하여, 가을, 7, 경술일, 조서로 우무후대장군, 화주도독, 회화군왕 이사마를 을미니숙사리필가한으로 하고, 그에게 고독을 하사했으며; 돌궐 및 호로 여러 주에 안치되어 잇는 자들은, 모두 영하여 황하를 건너게 해, 그 옛 부로 돌려보냈고, 세세로 번병이 되게 하여, 장구히 변새를 지키도록 했다. 동돌궐이 설연타를 두려워해, 새외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황제가 사농경 곽사본을 보내 설연타에 새서를 내려, 말했다. “힐리가 이미 패했으니, ...고로 내항한 부락을 하남에 두어, 목축함으로써 맡겼다. ...가을 중으로 장차 돌궐을 보내 황하를 건너게 하여, 그 옛 나라를 회복시킬 것이다.”

 

이는 명확히 돌궐 항호가 하남 지역에 있었음을 언급[提到 제도]하고 있고, 태종은 결사솔(돌궐 돌리가한의 동생)의 모자 사건으로 인해, 조신들의 건의를 듣고, 그들을 다시[重新 중신] 황하 북안으로 돌려보냈다. 당연히, 태종이 설연타에 대해 선언[ 선강]한 것은 모두 그럴싸한 구실[冠冕堂皇]의 일부였다. 이와 더불어 제 사적에 기록된 정관 4년 돌궐 항호를 오원 새하에 설치시킨 사실이 일치한다. 환언하여 설명하면, 돌궐 항호가 이미 하남지역에 안배되어 있었고, 정양도독부는 다시 그들에 설치되었으며, 이어서 해 부는 영삭현에 교치되었다는 것이 순리대로 조리에 맞는[成章 성장] 것이다.

  그러나 유통 선생의 의견은 홀략하게 할 수 없다. 설을 살피면, 당은 정양부와 운중부를 설치한 후, 이 양자는 또 모두 한대 군의 땅이었는데, 당이 설치한 부도 응당 이들과 유관할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2개 부의 명칭을 취한 의의가 전혀 없다. 어쩌면{/아마도}[], 태종 정관 4년 설치된 정양도독부는 한의 정양군 구지(즉 현재 내몽고 호화호특 동남 미대 고성)에 설치되어, 당지와 아직 남하해 황하를 건너지 않은 돌궐 항호를 통치[治理]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뒤에 형세에 변화가 발생한 것으로 인해, 정양부는 구지에 존류될 수 없었고, 마침내 남으로 하주 영삭에 이천된 것이다. 만약[如果] 이와 같은 양상으로 이해한다면, <신지> 정관 4년 힐리의 부중을 나누어 둘로 했다영삭에 교치했다는 응당 동시에 일어난 사정이 아닐 것이며, 영삭에 교치된 것은 뒤의 정황이다.(58)

  <신지>에 근거하면, 정양부가 소령한 아덕, 집실, 소롱과 발연 4개 주는 아사덕부, 집실부, 소롱부와 이름을 갖추지 못한 다른 한 부와 함께 분별되어 설치되었다. 아덕주는 유통의 분석에 의거하면, 응당 이정이 돌궐이 공파한 후, 그 중 3백장을 운중성에 옮기고 아사덕씨를 수령으로 한 그 한 부중을 가리킨다. 선우도호부의 성방에 위치[ 지처]하는, 이 부의 유지가 바로 정양부의 유지이다. 집실주는 돌궐추장 집실사력과 관계가 있는데, 정관 19(645), 집실사력이 명을 받아 부중을 이끌고 하주 북부에 주둔해 설연타를 방비[防范 방범], 집실주는 응당 바로 이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소롱주는 <신당서> 39 지리지3 태원부 태원군 조에 “(정관) 6(632) 소롱부락으로써 연연현을 설치하고, 순주에 예속시켰으며, 8년 양곡에 교치했고, 17년 없앴다라고 일컬은 것에 근거한다. 소롱이 정관 8년 양곡(현재 산서 양곡)에 교치되었고, 17년에 파하여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59) 발연주의 정황은 자세하지 않다. <신지>는 정양부가 4개 주를 관령했다고 하고, 정관 23(649) 제부를 나누어 3개 주를 설치했다고도 하며, <통감>에는 모두 6개 주가 있었다고 하는데,(60) 위에 가리킨 4개 주를 제한 외에, 남은 2개 주는 이름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신당서> 돌궐전에는 당이 거비가한을 공파한 후, 선우, 한해도호부를 나누어 설치하고, 소롱 등 24개 주를 선우부에 귀속시켰다고 기록해 말한다. 이는 정관 4년 정양부 설치 후, 그 속주가 늘어나 변동이 출현했음을 설명해 준다. 살피건대 동돌궐이 패망한 후에는, 북부 설연타의 세력이 확장되었다. 설연타와 항형하기 위해, 당은 정관 13(639) 이사마에게 부중을 이끌고 황하 북안으로 옮겨 가도록[调往 조왕] 했다(구지를 회복하는 변고의 우려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또 설연타를 방비할 수 있었다). 설연타는 그것을 우환으로 보고, 선후로 몇 차례 솔병하여 남쪽으로 공격했다. 정관 19, 설연타의 다미가한이 계위해, 당이 동쪽으로 고려를 정토한 것을 틈타, 병력을 이끌고 남하해, 당은 즉각 제로로 대군을 보내 포위에 초멸[围剿 위초]하고, 회흘, 복고, 동라 등도 또한 기병하여 습격해, 설연타는 오래지 않아 궤패했다. 이후, 돌궐의 거비부의 세가 성해, 설연타의 고지를 모두 점했다. 거비는 표면적으로 당에 신속함을 보였으나, 물러나서는 암중으로 병력을 적축하며, 입조해 근현하겠다고 말했지만, 지연시키면서 행하지 않았다. 정관 23, 당이 그가 이봊하지 않는 것으로 발병해 죄를 물어, 회흘, 복골 제부와 연병해 진공하자, 거비의 제 부락이 서로 이어 내항했다. 동년 10, 또 소롱 등 6개 주가 정양도독부의 속하에 귀속되었고, 바로 <신지>정관 23년 제부를 나누어 3개 주를 설치했다는 의의{의도}이며, 단지[只是 지시] 구체적인 주의 수는 제 문헌에 기재된 것이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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