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사와 마사아키 <당말의 번진과 중앙권력> 4. 헌종의 ‘중흥’ 書案

4. 헌종의 중흥

 

전절까지 덕종조의 번진-당조의 대응관계를 분석하면서, 그 기본적 지향과 배경에 대해 검토해 왔다. 그러면, 다음의 헌종조에 있어서 이들 당조-번진의 대응관계는 어떻게 발전했고, 중흥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달성되었는가. 본절에서는, 다시 당조와 번진의 대응관계에 주목해, ‘중흥달성까지를 3기로 나누어 분석하는 것에 의해, 각 세력의 지향의 전개 및 중흥의 본질을 탐구해 가고 싶다.

1기는 헌종의 대 번진 적극책이 확립된 시기이다. 그것은, 앞에도 언급한 것과 같은 사천의 유벽, 절서의 이기가 반란을 일으켜, 단기간에 평정된 것, , 평로절도사가 당조에 하나의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에 표현된다.

원화 원년(806), 검남서천에서 유벽이, 2, 절서에서 이기가 각각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지배기반의 약함으로 인해 단시일 내에 평정되었다. 이 약함은 전술한 것과 같이, 군의 중핵이 용병이었고, , 그들의 지배가 지군에까지 미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에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전후처리도 반란 주모자를 제거하는 것 뿐이었고, 그 외에는 모두 구체제 그대로 남겨진 것이다.

한편, 이들의 반란에 즈음하여 취해진 당조의 대응도 교묘한 점이 있었다. , 반란의 전국 파급을 우려하여, 가장 주의해야 할 하북 제진에 대해서는, 관위를 올려준다고 하는 대책을 취해 반란으로의 동조를 억누른 것이다. 이 결과, 유벽, 이기의 반란은 용이하게 평정되었고, , 평로절도사의 후계문제에 대해서, 당조가 절도사 임명을 거부했어도, 인번이 간섭에 나서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당조는, 사천, 절서의 반란 평정에 전력을 집중하는 것이 가능했고, , 절도사 임명 거부에 의해 일어난 평로 군내의 동요를 이용해, 양세 상공, 당조에 의한 관리 임명, 염법의 실시를 내용으로 하는 평로절도사의 양보를 획득한 것이다.

1기에 보이는 이와 같은 움직임은, 당조의 지향이, 하북 번진에 대해서는 (A)형번진으로서의 성격을 이용해 견제하거나, 혹은 지배를 침투시키고, (C)형 번진의 반란에는 그 평정에 집중해 재정적 기반을 확보한다, 고 하는 점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 방침을 확립한 헌종은, 회서, 하북의 개입으로 나아갔다.

2기는, 1기의 성공을 기초로 하여, 하북, 회서로의 개입에 나선 시기이다.

원화 4, 5(809, 810)의 성덕 왕사진, 회서 오소성의 죽음을 기회로 하여 당조 내부에서는, 이 양 번진으로의 개입이 의논되었는데, 여기서는 당조가 목적한 바를 엿볼 수 있다. 헌종과 관료의 사이에는 의견의 차이가 있었는데, 이강을 대표로 하는 관료의 주장은 회서를 우선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어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회서의 사주는 모두, 당조 지배가 모두 미치고 있는[] 주현들이고, (하북 등의) 반란세력은 통모할 수 없는 정황이 있습니다. 조정이 절도사를 임명하는 것은 지금이 바로 그 때이고, 만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토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덕의 이르기 어려운 계책을 버리고, 회서의 이루기 쉬운 꾀로 나아가야 합니다.”라고 하는 주장이고, 전술한 육지의 주장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것은 헌종 개인의 생각은 별개로 하고, 하북, 회서에 대한 당조의 의향이 덕종조 이래 일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하북제진에서는 각 번진 독자의 움직임을 보였는데, 기본은 덕종조에 보인 분립지향의 움직임이었다. 먼저 성덕군내에서는, 당조로부터의 절도사 임명을 받을 수 없었던 것으로부터 동요가 일어났고, 왕승종은 2개 주를 분할한다고 하는 조건에 기반해, 절도사 임명을 요구해 당조도 이를 인정했다. 그런데 위박절도사 전계안은 인번의 동요에 위구를 느끼고, 왕승종을 속이는 것에 의해, 당조에 반기를 드는 것에 성공했다. , 유주의 유제는, 소의군절도사 노종사가 성덕과 연대한 것을 살펴본 위에, 당조에 가담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북 내부에서는, 당조에 반항하는 성덕, 위박 거기에 소의가 잇었고 당조의 측에는 유주가 서 있었다고 하는 것과 같이 상호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주가 당조측에 섰다고 해도, 뒤로부터 명료해 지는 것이지만, 그 노리는 것은 당조로부터 지급되는 소위 식출계량이었던 것 같고, 친당조, 반당조의 구별은 있어도, 하북 내부에서의 전투는 적극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다른 한편, 하북 정토군의 내부에도, 환관이 총지휘권을 장악한 것에 대한 반발도 컸고, 성덕 정토는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부터, 헌종은 소의군절도사 노종사가 강제 송환된 것을 기회로, 성덕정토를 중지하는 것이 되었다.

이상과 같이, 2기는 하북 개입의 좌절의 시기였다. 당조는 회서의 후계자를 인가한 위에, 하북에 힘을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얻어낸 성과는 거의 없었다. 여기에는, 다시 하북의 뿌리깊은 분립지향의 성격이 표면화되어 그 힘을 발휘했고, 더욱이, 본래 하북 3진을 제압하는 역할을 받은 소의절도사까지, 하북 3진에 동조하는 것이 됨이 있었다.

3기는, 지금까지의 교훈에 입각해 중흥이 달성된 시기이다. 그 성공의 최대의 요인은 회서로의 공격 집중과 그 해체에 성공한 것이었다.

원화 9(814) 회서의 오소양이 죽은 것에 의해, 다시 제2기와 같은 정세가 전개되었으나, 역시 당조에 의한 정토는 진전되지 않았따. 그 사정은 유주절도사 유총의 움직임이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왕승종 정토의 명을 내린 것과 같이 적극적으로 당조에 복무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토의 명이 내려지자, 자신의 영역으로부터 겨우 ‘5진출했을 뿐이고, 게다가, 매월 15만 민의 탁지전을 얻었던 것이다. 그의 목적하는 바는, 성덕군 정토가 아니라, 당조로부터 지급되는 화폐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결과 하북이 강대하게 된 것은 백거이가 우려한 바에도 있다.

이리하여, 당조는 원화 12(817) 하북으로부터 철병하고, 회서에 전력을 집중하는 것이 되었다. 이 결과, 이소 등의 활약도 있어 회서 정토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희열 이래 30여년 간, 당조 지배의 장애가 되어 온 회서 번진은, 영역이 3분되는 것으로, 모두 해체되는 것이 되었다.

이 회서 정토의 영향은 커서, 하북 제진도 다투어 당조에 항복한다. 그러나, 평로만은 반항을 계속해, 마침내는 무력 토벌을 받게 되었는데, 이 때 전후처리도 또 회서 이상으로 철저한 것이었다. 인구, 토지, 군대, 자산 등을 조사한 위에 균등히 3분한다고 하는 방법이 취해져, 평로번진의 재현에 대해서 엄중한 주의가 가해졌던 것이다.

이상에 의해, 헌종의 중흥이 달성되었는데, 그 성과를 확보하기 위해 자사로의 군사권 분산이라고 하는 대책이 취해졌다. 그러나, 이 정책은 하북에서는 거의 효력을 갖지 못했던 것이 명백하다. 그것은 전술한 중흥의 달성의 경과로부터도 알 수 있는 대로, 당조의 하북 지배는 극히 표면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대책이 노린 것은, (B)(C)형 번진, 특히 (B)형번진 억압의 의미가 강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기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C)형 번진에 있어서는 자사가 수행하는 역할이, 이미, 중요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책이 어느 정도의 효과를 거두었던 것은, 히노 가이사부로 씨가 일반적으로 지적한 것에도 있다.

그러면, 이상 3기로 구분해 헌종의 중흥달성의 과정을 보아 왔는데, 이 과정에 표출된 각 세력의 지향은, (B)형번진이 그 지향을 명확히 하지 못한 정황이 된 외에는, 거의 덕종조와 같은 양상이었다. 그러나, 강화된 당조 재정은, 덕종조와 같이 당조-번진간 관계가 균형상태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군사권의 분산이라고 하는 대책을 취한 것에 의해, 번수 개인으로의 군사권 집중을 억압하고, (B)형번진의 출현을 예방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었다. 여기에, 헌종의 중흥의 역사적 역할의 일단이 엿보이며, 이리하여 당조는 이후 80여년 간의 연명의 기초를 구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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