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사와 마사아키 <당말의 번진과 중앙권력> 3. 덕종조의 대 번진정책 書案

3. 덕종조의 대번진정책

 

종래, 덕종조의 정책은 ‘1군에 1진병이 있으면 반드시 여기에 고식한다고 말해지는 것과 같은 고식정책의 측면이 강조되어 이해되어 왔다. 이 결과로서 당조 지배가 후퇴하고, 번진의 발호가 일층 심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해는 극히 일면적이고, 그 결과, 중앙 통일 권력으로서 끊임없이 자기의 지배 관철을 꾀한 당조의 일관적인 지향을 놓치는 것이 되었다. , 헌종의 중흥에 이르는 과정도, 황제 개인의 자질의 문제로 해소되어 버려, 지배 관철로의 일관된 방향성을 놓치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는, 황제 개인의 자질도 포함한 형태로 전개된 당조의 지배 유지 관철의 지향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면, 헌종조의 정책을 분석하려면, 육지(육선공)의 주장을 먼저 취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덕종이 즉위한 대력 14(779) 한림학사로 발탁된 이래, 정원 21(795) 충주별가로 좌천되기까지의 약 15년간, 덕종의 신뢰를 일신에 모았고, 특히 번진반란의 곤란한 국면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조칙이 그의 손에 의한 것이 될 정도로, 덕종에 의해 필요 불가결한 측근관료가 되어 있었다. 재상을 제치고[しのぐ] 권력을 갖고 있던 그는, 당시 내상이라고 칭해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덕종조의 대번진정책의 기본은 대부분 그에 의거했다고 생각되기에, 먼저 첫째로 그의 주장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육지가 주장하는 바는 꽤 다기하게 걸쳐 있으나, 큰 것은 두 점으로 집약된다. 첫번째는, 통일권력으로서의 당조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권위의 확립을 꾀하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당면한 정세에 있어서의 구체적인 대책, 즉 대 번진이라고 하는 면에서, 반란번진의 성격, 실상을 분석한 위에서의 현실적 대응책이다.

첫번째에 대해서는, 당시의 전국적인 반란정세에 대해 전국의 번진은 각각 반란측에 붙을 것인 가, 당조측에 붙을 것인가, 사태를 지켜보고 있고, 조금[いささか]의 착오[てちがい]도 용납되지 않는다라고 인식한 하에, 당조의 통일권력으로서의 지위가 위기에 닿아 있다는 것으로 주장된다.

이 주지의 주장이 처음으로 나온 것은, 덕종이 봉천부로부터 흥원부로 피난해 가고 있던 때였다. 이때, 백성의 고과를 바친 자가 있어, 여기에 감격한 덕종은 그에게 작위를 주려고 했다. 육지는 이를 막고, “당금의 병이 되는 바는, 바로 작위가 가벼운 것에 있습니다라고 하여, 덕종에게 충간했던 것이다. 그는 이 때 이미, 귀족적 질서의 상징인 이 가볍게 여겨지고 있고, 그것과 비례하여 당조의 권위도 잃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권위의 실추를 막으려고 경고를 발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주자의 난이 종결되고, 당조가 장안을 회복한 후에는, 더욱 명확한 형태로 내세워졌다. , 이때 주자의 항장 이초림이 봉상절도사로서 임명되었는데, 이를 교체시키기 위한다고 하는 의논이 일어났다. 이 의논에 대해 육지는, 이초림이 해를 가할 수 없다고 하는 정세를 분석한 위에, 먼저 당조의 체제를 정비하고, 위령을 부활시킨 후에 이초림을 교체시켜야 한다고 했다.

, 정원 원년(785) 하중의 이회광을 평정한 뒤, 그 세를 타고 회서의 이희열도 토벌하려 하는 의논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도, 육지는 당조의 권위 확립을 급무로서 반대론을 전개했다. 그 개요는 다음과 같았다. , 건중연간 이래의 반란은 일단 평정되는 것으로 귀결되었고, 당조가 그 지위를 부활시킨 것에 의해 천하의 정세는 크게 변화했다. 그러나, 지금 회서의 이희열을 토벌하려 하면, 잔존한 반 당조의 제 세력이, 다음에는 자신들이 노려지게 될 것을 두려워해, 다시 반란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당조가 해야 할 것은, 황제로서의 은혜와 위의를 더욱 확고한 것으로 하는 것에 있다. 이희열에 대해서는, 고립책을 취해 충분히 주의를 주면 스스로 해는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 덕종은 이에 따랐다.

이상과 같이, 먼저 첫째로, 바로 이 때에, 당조가 해야 할 것으로서, 중앙 통일 권력=당조의 권위의 부활과 확립이 제1의적으로 주장된 것이다. 육지는 중국 통일 왕조의 지배 유지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결과, 정원 연간에는 여기서 확립된 당조의 권위가 하북 번진에 대해 큰 역할을 달성하는 것이 된다. , 정원 6(790), 8(792)에 일어난 평로군, 성덕군 간의 항쟁에 대해, 당조는 양 번진의 조정자로서 등장해, 화평을 성립시켰다. 여기서는, 번진의 위에 선 통일권력으로서의 당조의 권위가 생겨났고, , 통일권력으로서의 존재를 타 번진 모두에 보여준 것이다.

다음으로, 육지의 주장의 두 번째에 대해서는 어땠는가. 앞에도 언급한 것과 같이, 그는 논양하급회서이해장에서의 요점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하북 제진은 당조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에는 반항하나, 그 직접적 영향은 그처럼 큰 것이 아니기에 를 써서 도모하면 된다. 그러나, 회서 번진이 가진 반 당조의 영향력은 비상히 큰 것이기에 엄중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육지의 주장은, (A) 분립지향형번진과 (B) 권력지향형번진을 명확히 구별하고, 조건에 따라서는 당조의 존립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B)형 번진에 충분한 경계를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육지의 주장의 기본은, 실제로 여러 정책으로서 실시되었다. 정원 15(799), 당시의 회서절도사 오소성의 허주 공격에 대항해, 당조가 토오소성조를 발하여 무력 토벌을 개시한 것은, ‘고식정책 하에서는 극히 특이한 것이다. , 시기는 전후에 해당하지만, 정원 3(787)에는, 회서의 견제라고 하는 명확한 의도 하에 이고를 산남동도절도사로 파견했다. 이와 같이, 당조가 회서에 대해 기울인 주의는 비상한 것이었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회서뿐 아니라, 하남 일대의 번진에 대해, 번진 세분화로 보이는 정책이 취해지고 있는 것이다.

정원 원년 3, 이징을 의성절도사로, 동년 7, 곡환을 진허절도사로, 동년 11, 장건봉을 서사호절도사로 임명했다. , 3 2월에는 진해절도사 한황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구 영역을 절서, 절동, 선흡지의 세 번진으로 분할했던 것이다. 이들 중, 의성, 진허, 서사호 각 절도사는, 이전부터 명목적으로는 존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거나, 혹은 수십년간 절도사가 임명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정원 연간 초에, 하남, 강남, 특히, 강회조운로에 연한 번진이 세분되어, 부활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당조가 목적한 바가, 강회 조운의 확보와 함께, ‘를 겸비한 (B)형 번진의 출현에 대해서의 예방조치였다고 보는 것이 가능하고, , 그것은 육지의 주장과도 합치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덕종조의 정책으로서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 재정 강화책이다.

주지하는 대로, 덕종의 재정강화책의 특징은, ‘세외방원’ ‘용도선여등으로 불리는, 번진으로부터의 사적인 진봉 - 진항은 단지 뇌물이었을 뿐’(<통감표미> 20)이라고 평가했으나 을 장려한 것에 있다. , 회복한 당조의 권위=귀족제적 작위사여권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조세수입보다도, 더욱 안이하게, 더욱 다액의 수입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이 대상이 된 번진은, 당연히, 전술한 (C)형 번진을 두고는 달리 없는 것이다. , 구당서 식화지에 있는 것처럼, 검남, 강서, 양주(회남), 선주(선흡지) 등 사천, 강남의 각 번진으로부터 일진’ ‘월진이라고 칭해질 정도의 진봉이 모여든 것이다. 더욱이 진봉은 헌종조에도 행해져 오대로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이 당조는, (C)형 번진으로부터의 수탈을 일층 가혹한 것으로 하는 것에 의해 지배를 계속 유지해, 헌종조의 중흥으로 이어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화폐경제의 발전이 촉진되어, 당조 지배를 근저로부터 파부수어 간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덕종조의 대번진정책의 본질은, 각 번진이 가진 성격을 분별하여 교묘하게 이용해, 스스로의 중앙 통일 권력으로서의 존재를 확립, 보지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C)형번진에 경제적으로 의거하면서, (B)형번진의 출현을 억압하고, (A)형번진에는, 그 통일권력을 부정할 수 없는 약점을 이용하여, 서서히 지배하에 들이려 하는 것이었다. 덕종의 소위 고식정책의 내실은 이와 같은 것이었고, 어디까지나, 당조 지배의 유지 관철을 주안으로 한 것이었다. 여기에, 헌종의 중흥으로 발전해 간 요인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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