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빈 <당조삭방군연구> 1장 1절 삭방군 설립 전의 서북 형세 書案

1절 삭방군 설립 전의 서북 형세

 

  상면에 인용한 글은 설회의가 삭방도행군대총관에 충임되어, 18명의 장군을 영솔해 묵철을 정토한 것을 기재하고 있다. 비록 정식으로 이루어진 일은 없었지만, 그러나 삭방도행군대총관의 설치는, 바로 당조가 돌궐에 항어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이는 당조와 돌궐의 관계 및 그 변화한 형세와 관련[牵涉 견섭]이 있다.

  돌궐인이 하나의 정체세력으로 막북 초원에서 굴기한 것은 서력 6세기 중엽에 시작되었다.(8) 당시, 돌궐인은 유연 정권의 공제 하에 있으면서, “금산 남쪽에 거하며, 여여의 철공이 되었다”(9). 서위 문제 대통 18(552), 돌궐 수령 토문이 부중을 이끌고 유연을 격패시켜, 그 공제를 이탈[摆脱 파탈], 칸국을 세우고, 자립하여 이리 가한이 되었다. 이 칸국은 통상 돌궐 제1칸국 혹은 돌궐 전 칸국으로 칭해진다. 그 세력은 신속히 발전하여 장대해져, 북부에서 동서로 걸쳐[横亘 횡긍] 초원과 사적{사막, 적막}지대를 공제했다. 그러나 뒤따른 내부 상쟁[争衡 쟁형]이 끊이지 않아, 수조가 건국된 때에 이르러 오래지 않아서, 돌궐은 동, 2부로 분열되었고, 동돌궐(또는 북돌궐로도 칭함) 칸국과 서돌궐 칸국이 형성되었다. 동돌궐은 지리상 중국왕조와 근접해 있었고, 쌍방 관계가 밀접했으며, 또한 쟁형 역시 부단히 이어졌다. 수조의 국력이 강성했을 때, 문제와 양제는 선후로 사신을 보내어 연락하고, 공주를 책봉해 혼인관계를 맺으며, 성방을 수축해 설치하고 심지어 군대를 파송해 정토하는 등의 방식으로 돌궐 일방을 지지하고, 수에 대항하는 다른 일방에는 타격을 주었다. 수조는 빠르게[很快 흔쾌] 멸망해 갔고, 중원 왕조의 위력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수조 북부 각지의 장수들은 농민기의, 사회동란의 기회를 타고, 분분히 군대를 끼고 자립해, 돌궐에 {원조를} 기대해[企求 기구], 그를 빌어 자신의 실력을 확대하려 했으니, 설거(10), 유무주(11), 양사도(12), 이궤(13), 두건덕(14) 및 뒤에 건립된 당조의 이연(15) 등이 이와 같지 않음이 없었다.

  이연이 당조를 건립한 이후, 상술한 할거세력과 당조의 대립이 격화되어, 당조와 그들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이러한 무장집단들이 나란히 돌궐에 투부해, 돌궐이 원래 취한 정책은 남부의 각개 세력을 지지하여, 그들이 서로 견제하게 하고, 스스로는 무리 가운데서 어부지리를 취하는 것이었다. 당시 당조의 실력은 이미 다른 세력들을 넘어서고[超出 초출] 있었고, 또 후자의 세를 많이 소멸시켜가고 있었기에, 원래의 평형을 타파해 나가고, 마침내 돌궐 스스로의 이익을 위협했다. 이때 돌궐은 이연이 수에 반해 기병한 것을 지지했던 것을 지나, 나아가 이연의 충성을 회의하게 되었다; 당조가 입국한 후, 돌궐은 총구를 돌려[调转 조전], 곧바로 이당을 겨냥했다. 당조가 이 방면에서 돌궐에 대한 태도는, 하나의 발전 전변한 과정이 있다. <구당서> 194상 돌궐전 상에 일컫기를 :

 

  고조(이연)가 태원(현재 산서 태원 남쪽)에서 기의하여, 대장군부 사마 유문정을 보내 시필가한을 빙문하게 하고, 끌어들여 지원으로 삼았다. 시필이 그 특륵 강초리 등을 보내 말 1천 필을 바치고, 강군(치소 정평, 현재 산서 신강)에서 만났으며, 2천 기를 보내 군대를 돕게 하고, 따라가 경성을 평정하게 했다. 고조가 즉위하는 데에 이르러, 전후로 상사한 것이, 기록하는 것을 이길 수 없었다. 시필이 스스로 그 공을 믿고, 더욱 교만하고 불손해[ 교거], 매번 사자를 보내 장안에 이르면, 얼굴에 횡자한 뜻이 많았고, 고조가 중원이 아직 평정되지 않은 것으로, 그때마다 그들에게 관대하게 대했다[優容 우용].

 

  이연은 자신의 세력을 발전시키며, 돌궐 기병의 지지를 필요로 했다; 돌궐이 남하하여 원조한 것은, 설거, 유무주, 양사도 등에 대한 조치[举措 거조]와 일호도 다르지 않았다{조금도 다르지 않았다}[毫无二致 무호이치]. 이당의 건국에 따라[随着 수착], 이연이 장기적으로 요한 것은 일방에 할거하여 칭웅[称雄]함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对手 대수]가 소유한 것을 정복하여, 수조의 통일 천하 형세[格局 격국]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돌궐인이 원한 것은 바로 이 일점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쌍방이 원래 상호 의지[依凭 의빙]했던 것으로부터, 성격이 변해 직접 대립하게 된 것이다. 북부의 각 세력들이 이당이 진공해 육박해 오는 것에 직면[ 면림], 모두 돌궐에 연락해 나아가 대항했던 것이다. 고조 1조가 끝날 때까지, 돌궐은 시종 당조를 습격하고 소요를 일으켰고[袭扰], 대규모로 진병하는 것을 부단히 지속했다.(17)

  무덕 9(626) 6, 당정 내부에서 발생한 현무문 사변으로, 진왕 이세민이 태자 이건성과 제왕 이원길 세력을 격패시키고, 고조 이연을 겁박하여 자신을 황태자로 책립하게 했으며, 동시에{아울러} 당년 8월 황제위에 올랐다. 당정 내부의 변화는, 돌궐인들에게 더 많은[更多 경다] 진공 기회를 주었다[给予 급여]. 이 전에는, 위의 글의 주 속에 열거된 것처럼, 돌궐이 계속[一直 일직] 당조에 대해 공세를 걸었다. 이때에도 또 1차적으로 대규모 진공을 했다. <구당서> 194상 돌궐전 상에 말하길 :

 

  (무덕) 9 7, 힐리가 스스로 10여만 기를 이끌고 나아가 무공(현재 섬서 무공 서쪽)을 구략해, 경사가 계엄했다. 기묘일, 나아가 고릉(현재 섬서 고릉)을 구략했고, 행군총관 좌무후대장군 위지경덕이 경양(현재 섬서 경양)에서 더불어 싸워, 그를 대파했다. ... 계미일, 힐 리가 그 심복 집실사력을 보내 입조하여 알현케 하고, 스스로 형세를 늘려 말했다 : “두 가한이 군대 백만을 총령해, 지금 이미 이르게 되었습니다.” 태종이 그에게 일러 말했다 : “나는 돌궐과 더불어 스스로[面自] 화친하고 있는데, 너희는 곧 그것을 배신하니, 나는 실로 부끄러울 것이 없다. 또 의군이 경사에 들어온 초에, 너희 부자가 모두 친히 나를 따라, 너희에게 옥백을 하사하고, 전후로 극히 많은데, 어찌 거듭하여 군대를 지휘해 나의 기현에 들어오는가? ...”

  태종이 시중 고사렴, 중서령 방현령, 장군 주범과 더불어 여섯 기로 위수의 위로 치달아 가서, 힐리와 더불어 나루를 사이에 두고 말하면서, 약조를 어긴 것으로 책죄하니, 그 수수들이 크게 두려워하며, 모두 말에서 내려 벌려서 절했다. 얼마 안 되어 많은 군대가 이어서 이르자, 힐리가 군용이 크게 성한 것을 보고, 또 집실사력이 붙잡힌 것을 알고는, 이로 말미암아 크게 두려워했다. 태종이 홀로 힐리와 더불어 강에 임해서 말을 나누고, 제군을 지휘하여 물러나 진을 치도록 했다. 소우가 적을 경시[轻敌]함으로써 말 앞에서 굳게 간했으나, 황제가 말했다 : “나는 이미 헤아려 두었으니, 경이 알 바가 아니다. 돌궐이 그 경내를 다 쓸어서, 위수가로 곧바로 들어온 까닭은, 응당 나의 나라가 처음에 내란이 있었던 것을 틈타고, 짐이 또 새로이 구오[제위]에 올라, 장차 감히 항거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짐이 만약 문을 닫는다면, 노적들은 반드시 크게 약탈할 것이니, 강약의 세가, 지금 일거에 달려 있다. ... 흉노를 제복시키는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날, 힐리가 화의를 청하여, 조서로 허락하고, 거가가 그날로 환궁했다.(18)

 

  이 일단에 기재된 것은 비록 당 태종이 일에 처하여 과단성을 보인 것과, 위기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않은 것을 자못[颇有 파유] 찬양[赞誉 찬예]하는 것이지만, 쌍방이 대치해 대항하는 준엄한 형세를 반영하기도 한다.(19) 어떤[有的 유적] 연구자가 여긴[认为 인위] 것과 같이, 이 시기 당과 동돌궐의 대치 형세는 이미[ 이경] 공수관계의 근본적 위치 변화가 발생했다 : 당조는 수조를 대신하여 중국에 군림하게 되었고, 동돌궐은 중원의 통일을 극력 저지하여, 쌍방의 관계가 대항하는 가운데에 처하게 되었다.(20)

  당 태종의 즉위 후, 직면한 중요한 문제는 여전히[仍然 잉연] 어떻게 돌궐에 대응[对付 대부]할 것인가였다. 태종이 힐리에게 물러날 것을 권하여 회군시킨 바로[就在 취재] 뒤인 9, 그는 조서를 내려북도의 여러 주에 설치한 바인 성채는, 조잡하고 흩어져 있어, 능히 모두 대비할 수 없다. ... 그 성채 진융(응당으로 써야 함), 반드시 수보(보수)함이 있어야 하고, 원근을 살피고 헤아리며, 공력을 계산해, 있는 곳의 군민들이 또 함께 영변(응당 으로 써야 함)하게 하고, 유사는 조식을 갖추어 지어서, 각각 공을 이루도록 하라.”(21) 태종은 북변 각지에 강한 성방시설을 갖추어, 돌궐이 남하하는 것을 방지하기를 요구했다.(22) 북부 성방은 고조 무덕 시기에 이미 출현하는데,(23) 태종은 시비를 가릴 것도 없이 구제를 계승한 것이다. 우리가 주의할 만한[值得 치득] 것은, 물론 고조가 아니라, 역시[还是 환시] 태종이, 변방의 성을 수선하는 것을 강화[加强 가강]하여 돌궐에 방비하는 것이, 단지[只是 지시] 방법[办法 판법]의 한 가지였고, 심지어 전혀[] 주요한 방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위] 변성은 당조 초기의 진, 수 방변계통으로 조성된 부분이며, <신당서> 50 병지에 일컫는 대로당 초기, 군대가 변방을 진수하는 것은, 큰 것은 군, 작은 것은 수착, , 진이라고 했다.”였기 때문이다. 이 일조[一套 일투]의 조직은 수조에서 온 것의 답습[沿 연습]이다.(24) 이를 제한 외에, 태종은 또 군대의 동원[调动 조동]을 이용하는 데에 주의[注意]하는 것을 더하여 돌궐을 방어했다. 이 시기 당이 이용할 수 있었던 주요한 군대는 행군으로, 곧 각개의 군사단위로부터 임시로 징집되어 규합[拼凑 병주]되어서 편성된 군대이다.(25). 정관 4(630), 당조가 동돌궐을 공격해 멸망시킨 주력이 바로 이러한 양상의 군대였다. <통감> 에 일컫기를 :

 

  병주도독 이세적을 통한도행군총관으로, 병부상서 이정을 정양도행군총관으로, 화주자사 시소를 금하도행군총관으로, 영주대도독 설만철을 창무도행군총관으로 하여, 무리를 합해 10여만 이었고, 모두 이적의 절도를 받았으며, 길을 나누어 나아가 돌궐을 쳤다.(26)

 

  정관 4 3, 당군이 돌궐을 격패시키고, 힐리가한을 부획해, 동돌궐 정권이 멸망했다.(27)

  현재의 분석으로는 동돌궐이 멸망한 것은 당군의 타격 외에, 실질적으로는 또 주요한 것은 그 내부의 갈등이 약화[削弱 삭약]를 불러왔기[导致 도치] 때문이다. 태종 정관 원년(627), 돌궐 동부의 해, 습 등 부락이 힐리 집단의 징렴에 반대한 것으로 인해, 돌궐에 이반하여 당조에 귀항했고; 음산(현재 내몽고 오랍특중후연합기에서 사자왕기 사이에 분포) 이북의 설연타, 회흘, 발야고 등 부중이 서로 이어서 배반해, 돌궐의 욕곡설을 쳐서 도주시켰다. 힐 리가 돌리를 보내 정토했으나, 돌리도 실패해, 엄하게 징벌하는 것을 받게 되었고, 이로부터 힐리와 분리되어, 다음해에 또 당조와 연결했다. 그리고 설연타는 가한을 자칭했으며, 당에 견사하여 방물을 바쳤다. <구당서> 194 상 돌궐전 상에 기록해 말하길 : “힐 리가 매번 여러 호인에게 위임하여, 족류와 소원해졌고, 호인들이 탐모하였으며, 성격도 번복함이 많아, 그 때문에 법령이 더욱 드러났으며, 병혁이 매년 움직여, 국인들이 그를 근심했고, 여러 부중이 휴이했다. 여러 해 동안 큰 눈이 내려, 육축이 많이 죽었고, 국중이 크게 굶주렸는데, 힐리가 용도하여 나누어 주지 않고, 거듭하여 여러 부중에서 무겁게 거두니, 이로 말미암아 아래에서 명을 견디지 못했고, 내외에서 많이 반변했다.” 당 태종은 바로 이 기회를 이용해, 신속히 대군을 징집해 그들을 공격해 멸망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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