伊慎,兗州人。善騎射,始為果毅。喪母,將營合祔,不識其父之墓。晝夜號哭,未浹日,夢寐有指導焉。遂發壟,果得舊記驗。-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이신은, 연주 사람이다. 기사를 잘했고, 처음에 과의가 되었다. 모친을 잃고, 장차 합부(합사, 합장)하기로 계획했는데, 그 부친의 묘를 알 수 없었따. 주야로 호곡하여, 열흘이 안 되었는데, 꿈에 가리켜 이끌어주는 것이 있었다. 마침내 밭두렁을 들추어 보니, 과연 예전의 기험(기록되어 증험, 검증할 수 있는 물건)을 얻었다.
大歷八年,江西節度使路嗣恭討嶺南哥舒晃之亂,以慎為先鋒,直逼賊壘,疾戰破之,斬首三千級,由是復始興之地。未幾,與諸將追斬晃於泔溪,函首獻於闕下。嗣恭表慎功,授連州長史,知當州團練副使,三遷江州別駕。
대력 8년, 강서절도사 노사공이 영남의 가서황의 난을 토벌하는데, 이신을 선봉으로 하여, 곧바로 적의 성루에 육박해, 급히 싸워 그들을 깨뜨리고, 3천 급을 참수해, 이로 말미암아 시흥의 땅을 수복했다. 얼마 안 되어, 제장과 더불어 가서황을 감계에서 추급해 참하고, 수급을 함에 담아 궐하에 바쳤다. 노사공이 이신의 공을 상표해, 연주자사를 배수하고, 당주 단련부사를 지직했으며, 세 번 옮겨 강주별가가 되었다.
討梁崇義之歲,慎以江西牙將從李希烈,摧鋒陷敵,功又居多。江漢既平,希烈愛慎之材,數遺善馬,意欲縻之,慎以計遁,歸命本道。明年,希烈果反。嗣曹王臯始至鐘陵,大集將吏,得慎而壯之。大集兵將,繕理舟師。希烈懼慎為曹王所任,遺慎七屬之甲,詐為慎書行間焉。上遣中使即軍以詰之,曹王乃抗疏論雪。上章未報,會賊兵溯江來寇,曹王乃召慎勉之令戰,大破三千余眾,朝廷始信其不貳。累破蔡山柵,取蘄州,降其將李良。又攻黃梅縣,殺賊將韓霜露,斬首千余級。優詔褒異,授試太子詹事,封南充郡王,又兼禦史中丞、蘄州刺史,充節度都知兵馬使。
양숭의를 토벌한 해에, 이신이 강서의 아장으로써 이희열을 따라, 예봉을 꺾고 적을 함락시켜, 공이 또 많았다. 강한이 이미 평정되자, 이희열이 이신의 재능을 아껴, 여러 차례 좋은 말을 보내고, 그를 매어두려 뜻하였는데, 이신이 꾸민 것을 알고 달아나, 본도로 귀명했다. 다음해, 이희열이 과연 반변했다. 사조왕 이고가 처음에 종릉에 이르러, 크게 장리를 모았는데, 이신을 얻어 그를 장하게 여겼다. 병사와 장수들을 크게 모으고, 주사를 선리(수리)했다. 이희열이 이신이 조왕이 임직시킨 바가 된 것을 두려워하여, 이신에게 7속의 갑주를 보내고, 거짓으로 이신에게 서한으로 행간의 내용을 전했다. 황제가 중사를 군대에 보내 그를 힐문하게 하자, 조왕이 이에 항소하여 혐의를 씻어주는 것을 논했다. 올린 서장이 아직 회보되지 않았는데, 적병이 강을 거슬러 올라와 와서 구략해, 조왕이 이에 이신을 불러 그에게 권해 싸우도록 영하여, 3천여 무리를 대파하니, 조정이 비로소 그가 두 마음이 없음을 믿었다. 거듭하여 채산책을 깨뜨리고, 기주를 취했으며, 그 장수 이량을 항복시켰다. 또 황해현을 공격해, 적장 한상로를 죽이고, 천여 급을 참수했다. 우조로 남다른 공을 기리고, 시태자첨사를 배수시켰으며, 남충군왕에 봉하고, 또 어사중승, 기주자사를 겸하게 했으며, 절도도지병마사에 충임했다.
建中末,車駕在梁、洋,鹽鐵使包佶以金幣溯江將進獻,次於蘄口。時賊已屠汴州,遣驍將杜少誠將步騎萬余來寇黃梅,以絕江道。慎兵七千,遇於永安戍。慎列樹三柵,相去數裏,偃旗臥鼓。於中柵聲鼓,三柵悉兵以擊,賊軍大亂,少誠脫身以免,斬級不可勝數,江路遂通。又破茍莽柵,進兵圍安州。賊阻涢水,攻之不能下。希烈遣其甥劉戒虛將騎八千來援,慎分兵迎擊,戰於應山,擒戒虛,縛示城下,遂開門請罪。以功拜安州刺史、兼禦史大夫,仍賜實封一百戶。希烈又遣將援隋州,慎擊之於厲鄉,走康叔夜,斬首五千級。希烈死,李惠登為賊守隋州,慎飛書招諭,惠登遂以城降。因密奏惠登可用,詔授隋州刺史。
건중 말, 거가가 양, 양에 있으며, 염철사 포길이 금폐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 장차 진헌하고자 하며, 기구로 갔다. 이때 적이 이미 변주를 도륙해, 효장 두소성을 보내 보기 1만여 명을 지휘해 황해에 와서 구략하게 하고, 그로써 장강의 수로를 끊었다. 이신의 병력은 7천명이었는데, 영안수에서 조우했다. 이신이 3개의 방책을 나란히 세우고, 서로 거리를 몇 리로 하며, 기를 기울여 두고 북을 뉘어 두었다. 가운데의 목책에서 북을 울리자, 세 목책에서 모든 병력으로 공격해, 적군이 크게 어지러웠고, 두소성이 몸을 빼쳐 면했으며, 참급한 것이 세는 것을 이기지 못했고, 강로가 드디어 통하게 되었다. 또 극망책을 깨뜨리고, 진병시켜 안주를 포위했다. 적도들이 운수를 막아, 그들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희열이 그 생질 유계허를 보내 기병 8천을 지휘해 내원하게 했는데, 이신이 병력을 나누어 영격하고, 응산에서 싸워, 유계허를 사로잡고, 묶어서 성 아래에 보이니, 마침내 문을 열고 죄를 청했다. 공으로 안주자사, 겸어사대부를 배수하고, 이어서 실봉 1백 호를 하사받았다. 이희열이 또 장수를 보내 수주를 구원하려 했는데, 이신이 그를 여향에서 쳐서, 강을 숙야(이틀 밤) 동안 달아나게 하고, 참수한 것이 5천 급이었다. 이희열이 죽자, 이혜등이 적을 위해 수주를 지키게 되었는데, 이신이 비서(화살에 매단 서한)로 초유하여, 이혜등이 마침내 성으로 항복했다. 인하여 밀주해 이혜등을 쓸 수 있다고 하여, 조서로 수주자사를 제수했다.
貞元十五年,以慎為安黃等州節度、管內支度營田觀察等使。十六年,吳少誠阻命,詔以本道步騎五千,兼統荊南、湖南、江西三道兵,當其一面。於申州城南前後破賊數千,以例加檢校刑部尚書。二十一年,於安黃置奉義軍額,以為奉義軍節度使、檢校右仆射。憲宗即位,入真拜右仆射。元和二年,轉檢校左仆射,兼右金吾衛大將軍。以賂第五從直求鎮河中,為從直所奏,貶右衛將軍。數月,復為檢校尚書右仆射,兼右衛上將軍。元和六年卒,年六十八,贈太子太保。
정원 15년, 이신이 안황등주절도, 관내지탁영전관찰등사가 되었다. 16년, 오소성이 조명을 저애해, 조서로 본도의 보기 5천으로, 형남, 호남, 강서 3도의 병력을 겸하여 통령해, 한 방면을 당하도록 했다. 신주성 남쪽에서 전후로 적을 깨뜨린 것이 수천이었고, 구례로 검교형부상서를 더했다. 21년, 안황에 봉의군의 병액을 설치하고, 봉의군절도사, 검교좌복야가 되었다. 헌종이 즉위하자, 입조해 좌복야를 배수했다. 원화 2년, 검교좌복야, 겸우금오위대장군으로 전보되었다. 제오종직이 뇌물로써 하중에서 진수하기를 구했는데, 제오종직이 주서한 바가 되어, 우위장군으로 폄적되었다. 수개월 후, 다시 검교상서우복야, 겸우위상장군이 되었다. 원화 6년 졸했고, 88세였으며, 태자태보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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