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唐書 卷144-1 尚可孤傳 書案

尚可孤東部鮮卑宇文之別種也代居松漠之間天寶末歸國隸範陽節度安祿山後事史思明上元中歸順累授左右威衛二大將軍同正充神策大將以前後功改試太常卿仍賜實封一百五十戶魚朝恩之統禁軍愛其勇甚委遇之為養子奏姓魚氏名智德以禁兵三千鎮於扶風縣後移武功可孤在扶風武功凡十余年士伍整肅軍邑安之朝恩死賜可孤姓李氏名嘉勛會李希烈反叛建中四年七月除兼禦史中丞荊襄應援淮西使仍復本姓名尚可孤以所統之眾赴山南累有戰功

상가고는, 동부선비 우문부의 별종이고, 대대로 송-막 사이에 살았다. 천보 말 국조에 귀순해, 범양절도 안록산에게 예속되었다가, 뒤에 사사명을 섬겼다. 상원연간 중 귀순해, 누차 좌, 우위위 두 대장군의 동정을 배수했고, 신책대장에 충임되었으며, 전후의 공으로 고쳐서 태상경을 시직했고, 이어서 실봉 150호를 받았다. 어조은이 금군을 통령하며, 그 용감함을 아껴서, 심히 그를 위우(신임, 예우함)했고, 시켜서 양자로 삼았으며, 성을 어씨로 주고, 이름을 지덕이라 하여, 금병 3천으로 부풍현에서 진수하게 했고, 뒤에 무공으로 옮겼다. 상가고가 부풍, 무공에 있었던 것이 무릇 10여년이었는데, 병사들의 대오가 정숙했고, 군대와 읍이 그를 평안하게 여겼다. 어조은이 죽자, 상가고에게 이씨를 내리고, 이름을 가훈이라 했다. 이희열이 반란한 것을 맞아, 건중 4 7, 겸어사중승, 형양응원회서사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본래의 성명 상가고로 되돌렸으며, 통령하는 바인 무리로 산남으로 가서, 누차 전공이 있었다.

 

及涇原兵叛詔征可孤軍至藍田賊眾方盛遂營於七盤修城柵而居之賊將仇敬等來寇可孤頻擊破之因收藍田縣興元元年三月遷檢校工部尚書兼禦史大夫神策京畿渭南商州節度使四月仇敬又來寇可孤率兵急擊擒仇敬斬之遂進軍與副元帥李晟決策攻討五月晟率可孤及駱元光之軍收京城可孤之師為先鋒京師平以功升檢校右仆射封馮翊郡王增邑通前八百戶實封二百戶

경원군의 병력이 반란을 일으킨 데에 이르러, 조서로 상가고의 군대를 불러들여 남전에 이르게 하니, 적의 무리가 바야흐로 성하여, 마침내 칠반에 둔영하고, 성책을 수리하여 그곳에 거했다. 적장 구경 등이 와서 구략했는데, 상가고가 여러 번 그를 격파하고, 인하여 남전현을 거두었다. 흥원 원년 3, 검교공부상서, 겸어사대부, 신책경기위남상주절도사로 옮겼다. 4월 구경이 또 와서 구략하자, 상가고가 병력을 영솔하고 급하게 쳐서, 구경을 사로잡아 그를 참했고, 마침내 부원수 이성과 더불어 진군하여 공토할 것을 결책했다. 5, 이성이 상가고 및 낙원광의 군대를 이끌고 경성을 수복했는데, 상가고의 군대가 선봉이 되었다. 경사가 평정되자, 공으로 검교우복야에 올랐고, 풍익군왕에 봉해졌으며, 봉읍을 전부 8백 호로 늘렸으며, 실봉이 2백 호였다.

 

可孤性謹願沈毅既有勛勣眾會之中未嘗言功賊平之後營於白花亭禦眾公平號令嚴整時人稱焉李晟甚親重之及李懷光以河中叛詔可孤帥師與諸軍進討次於沙苑遇疾卒於軍贈司徒賻布帛米粟加等喪葬所須並令官給

상가고의 성격은 근원(근신, 성실)하고 침의(침후하고 굳음)했으며, 훈적이 있고 난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에서, 일찍이 공을 말하지 않았다. 적도가 평정된 뒤에, 백화정에서 둔영하며, 무리들을 무어하는 것이 공평했고, 호령이 엄정해, 당시 사람들이 그를 칭찬했다. 이성이 심히 그를 친하고 무겁게 여기고 대했다. 이회광이 하중으로써 반변한 데에 이르러, 조서로 상가고에게 부대를 지휘해 여러 군대와 더불어 나아가 토벌하게 했는데, 사원으로 가서, 병을 만나, 군중에서 졸했다. 사도를 추증했고, 부의로 포백과 미속을 하사하며 가등(등위를 올려서 지급함)했고, 상을 치르고 매장하면서 필요한 바는, 아울러 관에서 지급하도록 했다.


덧글

  • 無碍子 2012/07/29 11:50 # 답글

    곽자의공은 끝난 겝니까?
  • blackace 2012/07/29 11:58 #

    조만간 재개할 예정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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